큰나로서 바라보는 자세

한국 선(仙)사상의 핵심은 무엇일까? 잊고 있던 나의 존재성으로의 회기?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 흔적을 어떻게든 알게되면 그 근거에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 하나됨을 통해 세상에 진리를 드러내는 과정일까?
이 사상은 전 세계 종교/수행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.
나의 존재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근거를 알게되는 기회를 맞땋뜨리는 상황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?
짧은 지식이지만 종교와 수행의 역사를 통해 본 바, 많은 사람들이 몇천년의 역사에서 노력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려가며 얻으려고 했던 그것은 분명 우리가 확률적으로 어렵다고 얘기를 하는 것 이상의 문제였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.

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로서, 그리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닌 진짜 나의 모습으로 매 순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얻은 관찰이 있다면 아래와 같다.
육체를 가진 생명체로서 감정, 정서, 감각에 대한 이성적 통찰이 꼭 필요하다는 것.
그리고 내가 가진 유전적 정보, 이 땅에 태어나게 이유가 분명이 있기에 지금 이 삶에서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그 무엇인 반드시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.
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잘하고 못하는 것을 분별해 내야 하는데 효율적인 분별을 위해 내가 정말 잘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해 봐야 한다. 참을 가려내기 위해 참이 아닌것을 지우다보면 참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처럼. 물론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. 내가 잘 못하는 것은 나의 성향이나 성격, 관심도, 등등 여러 요인들에 의해 결정이 되는 영역일수 있다. 문제는 잘 못한다는 것이 사회의 통념이나 교육된 습관적 사고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되돌아와 심리적 스트레스를 항상 안고 산다는 것이다.

잘 못하는 부분을 가려내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잘 하는 부분이 드러난다.
대개 불편하거나 두려운 상황을 맞닿뜨리면 피하거나 잘 못하는 부분이라고 쉽게 규정할 수 있다. 하지만 그 내면을 좀 더 깊게 살펴보면 두려움이 드는 부분이 어쩌면 내가 가장 잘 하는 분야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.
우주의 설계가 완벽한 것이고 내가 마주하는 순간순간이 다 우주의 설계에 의해 정말 섬세하게 고민되어 내 앞에 주어진 것이라면 그 불편함이나 두려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?
동물이나 사람이나 두려움을 느낄때 집중도가 올라간다. 생명을 유지하고자, 자신의 comfort zone을 지키고자 자연스레 발동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. 그 집중의 힘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? 회피나 도망치는곳에 사용하지 말고 오히려 그 상황에 용기있게 마주대하는 힘으로 작용케 한다면? 결국 그런 discomfort 한 상황들은 큰 그림에서의 ‘나’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작은 그림으로서의 ‘나’가 아닐까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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